관계를 읽는 시간 / 문요한

josep.k 2019. 1. 30. 22:35

-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사람으로 되어간다고 본다. 그렇기에 사람의 변화와 발전 가능성에 주목한다. (p.2)


- 나는 몇 년 전부터 '바운더리(boundary)'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관계의 문제와 해법에 접근하고 있다.

내담자가 과거의 관계틀을 이해하고, 어른의 관계틀로 바꾸는 데 바운더리 개념이 무척 효과적인 도구임을 숱한 상담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운더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인간관계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게 하는 자아의 경계이자, 관계의 교류가 일어나는 통로를 말한다. 자아의 진짜 모습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바운더리라는 형태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 바운더리의 핵심 기능은 보호와 교류다. 바운더리에 이상이 있다는 말은 '나'와 '나 아닌 것'을 혼동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를 보호하지 못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잉보호를 하는 등 상호교류에서 어려움을 보인다. 그에 비해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은 굳이 거리를 두려고 애쓰지도 않고 자신을 속이거나 희생하며 인간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면서도 친밀해질 수 있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내보낼 수 있다. 바운더리의 보호와 교류 기능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바운더리 심리학은 지금 모습으로 충분하다는 위로의 심리학이 아니라 당신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변화의 심리학이다. 나는 당신이 자신을 돌보면서 상대와 친해지고, 당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처럼 상대를 상대의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존중하고, 갈등을 피하기보다 갈등을 풀어갈 줄 알고, 상대를 염두에 두되 원치 않는 것은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한 가지 양해를 바라는 것은 '바운더리'라는 말의 뉘앙스를 대신해줄 적절한 우리말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경계' 또는 '영역'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바운더리'의 의미는 '보호'와 '교류' 양면을 강조하는 데 비해 이 단어들은 '보호'라는 의미에 치우친 감이 들어 '바운더리'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p.12)


- 일정한 모양의 빵을 계속 구워내는 빵틀처럼 인간관계에는 틀이 있다. (p.13)


- 다른 사람의 요청을 잘 들어주고, 늘 습관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착하다' 고 한다. 이게 과연 '착한' 게 맞나? 혼란을 줄이려면 착함을 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착함'과 '미숙한 착함'이다. 먼저 '미숙한 착함', 이것은 간단히 말해 '순응'이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어린이의 모습과 같다. 아이들은 힘이 약하고 비판적 사고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다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누가 시킨다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른이 아이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따라 한다면 착한 것이 아니라 미숙한 것이다. '아이-어른'의 관계에서는 필요했던 '순응' 이라는 방식을 '어른-어른'의 관계에서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p.26)


- 착한 사람은 굳이 스스로에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다. 또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까 너도 나에게 이만큼 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계산하지도 않는다. 상대와의 관계가 염려되어 자기가 힘든 걸 참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숙한 착함' 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은 인간관계를 추구한다. (p.29)


- 착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돌보지 못할 만큼 자아가 약해서 인간관계가 힘들다. 성인에게 나타나는 '미숙한 착함' 아래에는 '낮은 자존감'과 '발달하지 못한 바운더리'가 자리잡고 있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는 슬프게도 스스로 위안과 기쁨을 만들어낼 줄 모른다. 그런 자아를 지닌 사람들은 관심사나 취향, 성격 등의 동질감에 기초해서 편안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과잉친절이나 순응을 통해 상대방의 인정과 관심을 얻고자 한다.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위안과 기쁨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히 시간이 지날 수록 관계는 한쪽으로 기운다. (p.30)


- 그냥 자기 방식대로 열심히 잘해주면 상대도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관계를 맺는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막대사탕을 엄마에게 한가득 주면 엄마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도 같다. 서연은 상대를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체로 바라보지 못한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바운더리'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늘 엄마랑 같이 있으려고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엄마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아이와 같다. 결국 과잉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상대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상처받는다. (p.31)


- 왜 상처는 가까운 사람이 줄까?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p.32)


- 세상에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참 많지만 하나하나 속을 들여다 보면 인간은 참 약한 존재다(돌려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인간은 인간에게 너무나 쉽게 상처받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이중적이다. 사람 덕분에 기쁘고 행복하지만, 또한 사람 때문에 고통받도록 설계된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p.34)


- 신체적 고통을 잘 느끼도록 설계된 덕분에 인간은 몸을 보호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고통은 곧 관계를 잘 돌보라는 신호다. 상대가 나를 무시해도,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도 우리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애초부터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상처받기 쉽다는 말은 거꾸로 우리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존재라는 말과 같다. 당신도 얼마든지 상처를 주는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이라거나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이타적이기 짝이 없는 사람이거나 공감의 명수여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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